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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화의 생물다양성여행】가시연꽃, 50년만의 화려한 외출 조회수 2309 등록일 2014.08.27

가시연꽃, 50년만에 화려한 외출



<사진 강릉시청>

“앗, 따가워!”

금세 손가락에서 빨간 피가 났다. 언제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호기심이 탈이다. 물 위에 떠 있는 거대한 가시연잎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기만 했다. 개구리 왕눈이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뛰어놀고도 남을만큼 잎사귀는 거대했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문득 보이지 않는 저 잎사귀 뒷면이 궁금해졌다.

망설일 틈 없이 용감하게 가시연잎을 뒤집었다. 앗, 그런데 잎사귀 뒷면은 온통 가시로 촘촘했다. 특히 잎맥에 더 날카로운 가시들이 박혀 있다. 그것도 모른 채 용감하게 집어 들었다니…. 물 위에 뜬 잎사귀는 초록색인데 잎사귀 뒷면은 보라색, 노란 잎맥의 빛깔까지 더해져 무척 신비로웠다. 가시연은 왜 날카로운 가시로 중무장하여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을까?

“와아, 가시연꽃이다!”

드디어 찾았다. 둥근 가시연잎이 수면을 가득 메운 가운데 보일락 말락 자세히 봐야만 겨우 보이는 곳에 가시연꽃이 딱 한 송이 피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고 싶은데 물 한가운데에 피어 있어 애만 탔다. 작고 수줍은 저 보라색 꽃을 보기 위해 나는 새벽바람에 서울에서 강릉까지 달려왔다. 왜냐하면 저 가시연꽃은 무려 50년만에 부활한 꽃이기 때문이다.

너른 호수 위로 중대백로가 긴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가로질렀다. 물 위에는 흰뺨검둥오리 가족들이 나란히 헤엄치고, 민물가마우지들이 검은 깃털을 열심히 털어댔다. 습지 한쪽에는 연꽃들이 빼곡하게 차지해버렸다.

“샤워기들이 많이도 나왔네.”

누구는 샤워기라고 하고 누구는 벌집을 닮았다고 하는 연밥들이 햇볕을 많이 받으려고 고개를 쑥쑥 내밀었다. 좋은 구경을 하려고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치켜든 구경꾼처럼 모두 한쪽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렇게 연꽃들이 장관을 이루고 수련과 애기부들이 세력을 키워가고, 마름과 물달개비, 갈대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습지식물들이 집결한 것처럼 다양한 식물들이 어울리고 있는 이곳은 그 이름도 유명한 강릉시 경포호 가시연습지이다.




<사진 강릉시청>

매토종자가 싹을 띄우다

1920년대 경포호는 약 160만㎡, 둘레 약 12km나 되는 너른 호수였다. 그런데 1960년대 자급자족과 식량증산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배고픈 시절, ‘버려진 땅, 쓸모없는 땅’이라고 생각했던 호수 주변의 습지를 모두 논으로 개간했다. 1970년 초에는 경포호로 흘러오던 경포천과 안현천 두 하천의 물길을 곧바로 바다로 흘러들 수 있게 직강화 사업을 하면서 1920년대에 비해 호수 크기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경포호로 흘러들던 하천의 물이 끊어지고 하구에 보를 설치하여 바닷물도 단절되자 경포호의 물은 급격히 탁해졌다. 심한 악취가 나고 물고기가 폐사했다. 그러자 2000년대 초 무렵,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경포호의 원형을 되찾고 생태계를 살려야 한다는 지역 사람들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경포호 생태습지복원 사업을 시작했다.

“마을 어르신들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에는 이곳에 가시연꽃이 많이 피었다고 해요. 가시연꽃 씨앗을 까먹었다고도 해요. 그래서 확신이 생겼어요.”

경포습지 복원을 책임담당인 강릉시청 조영각 팀장님은 이렇게 얘기했다. 마을 할아버지들이 어릴 적에 가시연꽃을 흔하게 보았다고 하고, 문헌자료에서도 가시연에 관한 기록이 있었다. 또, 여러 자료를 찾아 공부해보니 가시연 씨앗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싹이 트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2009년 강릉시는 경포호 주변 논을 몇 곳 사들여 실험을 했다. 논흙을 걷어내고 물을 넣고 그대로 두었다. 그러자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옮겨 심지 않았는데도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싹을 틔웠다. 그리고 2010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시연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무려 50년만에 다시 핀 반가운 꽃이었다. 어두운 땅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매토종자(땅속에 살아 있는 휴면종자)가 수심과 온도, 빛의 조건 등 최적의 조건이 만들어지자 스스로 싹을 틔운 것이다. 이 놀라운 일을 기념하여 새로 복원한 경포호 습지 이름을 아예 ‘가시연습지’로 바꾸었다.

 




습지를 복원하는 원칙

가시연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잎을 가진 식물인데, 큰 잎의 지름이 120cm에 이른다. 잎과 잎자루, 꽃받침에 날카로운 가시가 촘촘하게 나 있어 가시연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큰 잎이지만 한해살이 식물이고, 연못이나 늪에 주로 사는데 환경부가 정한 멸종위기동식물 2급으로 희귀식물이다.

가시연꽃은 둥근 가시연잎 가운데를 ‘뽕’ 뚫고 올라와 보라색 꽃을 피우고, 꽃이 지면 물속으로 다시 내려간다. 가시연잎에 구멍이 뚫린 흔적은 꽃봉오리가 올라왔던 자리이다. 바로 그 아래 물속에서 가시연 씨앗이 영근다. 가시연 씨앗은 딱딱한 껍질이 있는데, 이 껍질 덕분에 흙속에 묻혀 있다가 50년만에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씨앗의 겉에는 하얀 막이 감싸고 있어 물에 떠다니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번식할 수 있다.

가시연꽃의 북방한계선을 충주지역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강릉에서 가시연꽃이 다시 피면서 기록을 다시 수정해야 하는 즐거운 일도 생겼다. 지금 경포습지에는 가시연꽃 외에도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자라고 있는데, 연꽃과 수련만 외부에서 옮겨 심었을 뿐 여러 식물들은 가시연꽃처럼 스스로 싹을 틔운 것이다.

경포호와 경포습지를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지역의 전문가, 시민단체, 지역주민, 공무원이 참여한 ‘경포습지 복원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방향을 설정하고, 공간 구성과 대상지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협의를 이어갔다.

이 복원대상지 공간 구성에서는 ‘유네스코 맵(UESCO MAB)-인간과 생물권-프로그램’ 개념을 도입했다. 이것은 철새와 야생동물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도록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게 정한 핵심구역과, 체험과 생태교육 프로그램을 할 수 있게 만든 완충구역,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하면서 누구나 지속가능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전이구역으로 나누어 디자인했다.

덕분에 경포호와 가시연습지는 강릉 시민들의 자랑이자 좋은 휴식공간으로 거듭났다. 가시연습지 입구에는 방문자센터가 있고, 전문 해설사들이 이 습지와 습지생태계에 대한 풍부한 해설을 해 준다. 철새학교와 습지생태학교, 습지해설사 교육 등 다양한 시민 프로그램을 열고 있고, 가시연꽃이 피는 7~8월에는 사진작가들도 즐겨 찾고 있다.

 





담수생태계와 해양생태계가 만나는 곳

경포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구와 석호로 만들어졌다. 석호는 해수와 담수가 서로 교류하면서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는 곳인데, 우리나라 석호는 지금부터 약 4천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약 112km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석호는 경포호, 향호, 영랑호, 송지호, 화진포호 등 약 18개가 있다.

이곳은 동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철새도래지이자,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먼 거리를 날아가는 철새들이 잠시 쉬어가는 중간기착지 역할을 한다. 경포호에 찾아오는 철새와 텃새, 나그네새는 112종이나 된다. 경포호의 염분은 바닷물보다 약간 낮아 바닷물고기의 치어들이 살고 있고, 경포습지에는 숭어와 황어, 전어, 붕어, 잉어, 가물치 같은 다양한 물고기도 살고 있다. 삵과 수달, 족제비, 고라니, 너구리, 다람쥐 같은 야생동물들도 이곳을 즐겨 찾아오고 있다.

석호는 바다와 완전히 막혀 있지 않고 갯터짐 현상이 생기면서 순환한다. 갯터짐 현상은 장마나 홍수, 높은 파도가 일면서 바다와 호수를 막고 있던 모래사구가 터지면서 담수생태계와 해양생태계가 서로 만나는 것이다. 이 때 석호에 있던 풍부한 영양분들이 바다로 나가면서 바다에는 플랑크톤이 생기면서 생명력이 왕성해지고, 석호의 물은 맑아진다. 경포호 주변 습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던 시절에도 이곳에는 영양분이 풍부해서 다른 지역보다 쌀 생산량도 많았다고 한다.

요즘 강릉시는 경포호 북쪽에 있는 순포습지를 복원하고 있다. 순포라는 이름은 수생식물인 순채(蓴菜) 나물이 번성했던 지역이라서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순포습지를 복원하면서 가시연꽃처럼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순채 씨앗이 스스로 깨어나 위대한 자연의 생명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우리를 놀라게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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